단수를 벗어나, 그러나 정신줄부터 잡고.

小說을 쓰겠오.
<おれ達の遺鞭を神様にみせびらかしてやる>
그런 駭怪망測한 소설을 쓰겠다는 이야기요.

- 私信(三)


여기에서 사사로운 편지(私信)를 빌어 소설을 쓰겠다고 말하는 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중간의 일본어 문구를 거칠게 해석해보면 “우리들의 遺鞭을 신에게 보여주겠어.”라는 뜻이 될 것인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단연 “우리들의 遺鞭”이라는 부분이다. 왜 ‘나의’가 아닌 ‘우리들의’가 되는 것인가. 이미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이상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일인칭으로는 표기될 수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더욱이 遺鞭은 「종생기」에 나오는 “산호채찍珊瑚鞭”과도 연결 지을 수 있겠으나, 좀 더 쉽게 생각하면 같은 발음의 遺編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遺作 혹은 遺書임에 다름 아니다. 즉, 조선총독부 건축기사였던 김해경은 소설을 씀으로서 단수가 아닌 복수가 되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李霜을 새롭게 얻었으며, 그것이 곧 그 자신의 유서를 쓰는 행위임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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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건 결국엔 소위 예술을 하겠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통용되는 이야기라 할 수있다. 소설을 쓴다는 것도 "나"라는 단수를 벗어나 복수가 되어보는 행위이며, 결국 그건 자아의 상징적인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요즘 스터디를 하면서 자주 듣고 또 쓰게 되는 말이 "메타적"이라는 말이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나"로부터 한 발 물러난 곳에서 지금의 위치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폴 오스터의 <기록실로의 여행>에서 보여지듯 무한히 반복되는 미장아빔mise en abyme 속에서 우리는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이 제멋대로 미끄러지는 기호들 속에서 다시금 "나"라는 허망한 서사의 퍼즐을 끼워맞추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ps. 오늘 이상 발표를 했어야 했는데, 결석해서 못했습니다. 흐흐, 이건 뭐, 창피해서 남한테 말도 못하는 뒷사정에 몸서리치며 이상이나 다시 읽고 있네요. 학기말에나 할 재발표나 미리 준비할 요량으로. 쩝.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왜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살지. 단수를 벗어나기 전에 정신줄부터 잡아야지요. 


by BarSur | 2009/04/27 23:48 | 읽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대물림 되는 서사, 해체되는 서사.

조정래의 <회색의 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할 것이 없는 소설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형제가 다시금의 아버지의 과거를 알아가게 되는 서사의 흐름은 지극히 평범하다. 서사를 끌어가는 서술방식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82년도에 쓰인 소설로서 결말에 드러나는 아버지의 과거사나 그 소재상의 측면 또한 신선함을 안겨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 독자로 하여금 서사를 읽도록 추동하는 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국에 가족을 붕괴하도록 만들었으며 이제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과거를 반추함으로써 되새겨지는 ‘대물림’의 정체를 알고자 하는 서사적 욕망이다. 

사실 소설이 취하고 있는 형식은 ‘대물림’의 본질을 알려주기를 꺼려하면서 현재 ‘아버지 사후’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다가 어머니와의 합장이 다 끝난 뒤에야 박 영감의 목소리를 빌려 과거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액자식으로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힘은 끊임없이 현재 속에서 과거로 되돌아가 그 순간을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에 근거하고 있는데, 많은 것들에 대하여 서술자인 ‘나’의 목소리를 빌려침착하게 과거와 현재 사시의 인과관계를 풀어내려 한다. 이것이 가장 1차적인 욕망의 해소 방법이라면 결국에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는데, 공백으로 가려진 아버지의 삶의 비밀에 대하여 알 수 없다면 인과관계만으로는 그 서사를 완전히 이해하는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형이 네 차례에 걸쳐 실패를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대물림’이자 ‘나’와는 달리 형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일 것인데,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우리의 욕망을 통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한 하나의 서사는 과거의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프로이트의 주장은 그에 대한 비판과 관계없이 유효하다. 바로 억압된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있다는 점.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는 놀라운 점은 그것이 개인의 서사로만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서까지 이어져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결국 형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단순히 ‘대물림’된 아버지의 과거 경력 때문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자신을 통해 재현되는 서사이자, 아버지 때부터 억압된 욕망이기도 하다. 

결국 이 소설의 결말에 형이 “난 결국 아버지 속에 있는 놈일 뿐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과거의 실패뿐만이 아니라 최초의 욕망에서부터 이미 그는 아버지의 서사 속에 이를 되풀이했을 뿐임을 고백하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내 마음속에서 아직 돌아가시지” 않을 수밖에 없으며, ‘거미만도 못한 아버지’와 ‘술 취한 박쥐’인 형은 닮은꼴임을 상기시켜준다. 이제 아버지를 ‘한 마리 거미만도 못해’라고 비난한 형의 목소리는 하나의 역설이 되는 것이다. 자기 몸을 자식에게 먹여 키운 부모 거미처럼 아버지의 서사는 고스란히 형의 몸을 통하여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형이 아버지의 삶의 비밀을 알고 싶어 했던 것은 그것이 아버지의 서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읽는 데에도 필수불가결한 것이었기 때문임은 이런 의미에서도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합당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의 서사를 답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사는 나름의 방식으로 변형되거나 전혀 다른 의미를 낳기 마련이다. 라캉이 "프로이트로(기원으로) 돌아가자"고 말했을지라도 그가 읽어낸 아버지의 서사는 이미 전혀 다른 방식의 그의 서사가 되었듯이 말이다(물론 라캉이 프로이트의 아들이라 부른다면, 딸로서의 크리스테바에게도 이는 통용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프로이트는 그 아들격인 라캉에 의하여 새롭게 태어나 우리에게 다시 읽혀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아버지를 해체(데리다의 관념을 빌어 말하자면)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버지를 새롭게 탄생시킨다. 이제 내가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관념까지 해체된다. 결국 대물림 되는 서사란, 새롭게 읽는(다시 읽는, 고쳐 있는) 서사이며 헤체되는 서사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ps. 태백산맥도 읽지 않은 내가 조정래의 단편을 논하기란 어딘가 찝찝한 일이었는데, 결국엔 어떤 식으로든 이글에서도 조정래의 <회색의 땅>은 죽고 결국 나의 <회색의 땅>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는 것. 

ps2. 대학교 마지막 셤공부나 열심히 해야죠. 이번주엔 학위청원서 내고, 다음주엔 대학원 원서 접수로군요. 별 볼일 없는 근황이랍니다.


by BarSur | 2009/04/20 20:42 | 읽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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