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

소설 <광장>으로 유명한 최인훈이 1973년에 쓴 희곡 <봄이 오면 산에 들에>는 언어를 통해 꿈을 꾸었던 소설가가 언어가 아닌 다른 꿈을 꾸게 된 연유를 지시해주는 작품이다. 말더듬이 아버지와, 자꾸만 침묵하는 딸 달내, 그리고 바람소리 속에 섞여 흐느끼듯 존재하는 문둥병의 어머니.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소리'의 존재로만 등장하며 달내를 통해 재현되고 동일시되는 어미는 배제의 논리가 만들어낸 일종의 국외자인 것이다. 또한 달변의 포교를 통해 드러나는 랑그(Langue), 언어를 통한 권력의 작용이 존재한다면,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 말과 행동을 더듬은 아비의 모습과, 달내의 침묵이야 말로 우리에게 오히려 언어가 아니라 침묵 속에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알려준다. 

문둥이의 탈을 통해 드러나는 어미의 존재는 푸코의 말처럼 "가면을 쓴 진실"을 지시해주는 것이며, 자신의 목소리로 소리낼 수 없는 광기(사회적 병리학을 통해 배제된 그 모든 것들 : 노인, 여성, 광인, 성적소수자, 불법체류자. 그 모든 우연적인 특성을 마치 고유의 정체성처럼 부여받은 자들)가 가지는 오롯한 자기증명이기도 하다. 어미가 흐느낌이 담겨있는 바람소리는 개인을 넘어서 어떤 집단적인 분노의 소리로 변화하는데, 이는 배제의 논리에 의해 국외자가 되어버린 자들의 흐느낌이기도 하다. 본디 소설을 보는 것은 언어를 보는 것이면서, 행간을 읽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침묵에서 소리를 듣는 행위이기도 한데, 이것을 모르면서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는 건 허사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1970년대, 언어로서 언어를 억압하는 시대에서 소설가 최인훈이 정통하지도 않은 희곡이라는 장르를 선택하면서 행위와 침묵으로 전달했던 가면의 진실과 그 목소리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그건 결국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 아닐가. 


남과 내가 서로 스미고 얽힌 자리는 혼돈스럽다. 남도 남이 아니고 나도 나일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남이 곧 나인 것도 아니고 내가 곧 남일 수도 없는 혼돈은 게서 그치지 않는다. 함께인 듯 홀로 살고, 홀로인 듯 함께 사는 게 우리네 삶 아닌가. 토도로프의 표현대로 '고독한 공생(Living Alone Together)'이란 역설적인 운명 앞에서 그 누군들 함부로 자유로울 수 있으랴. 그런 점에서 모든 삶은 불우하거나 불온하다. 문학 또한 마찬가지다. 삶과 문학의 관계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문학을 통해서 남의 얼굴을 보고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자 애쓰는 것은 '홀로-함께 살기'의 운명을 확인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려는 낭만적 동경이자 형이상학적의 욕망의 형식인지도 모른다. 또 남 속의 나, 나 속의 남을 새롭게 발견하여 신생의 에피파니를 도모하려는 상호주관적 타자와 상호주관적 주체들의 힘겨운 안간힘인지도 모른다. 

- 우찬제, <타자의 목소리> 중에서.


결국 딴소리지만, 2MB의 용량으로 유명한 현정부를 비롯한 현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압도적인 담론에 대해 내가 가지는 반감이란 아주 단순한 것이다.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줄 모르는, 상상력이 제한된 대뇌의 기능만을 수행하려는 모습. '국외자'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수용하려고만 하는 논리는 이미 용산참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던가. 그들은 자꾸만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추방한다. 일제강점기 임화의 <네거리의 순이> 이후 한 세기를 지나 정끝별 씨의 시 <또다시 네거리에서>가 또다시 지시하듯 이 훤히 뚫린 네거리에서, 또한 막힌 골목에서 우린 어디로 더이상 물러날 것인가. 



이 아름다운 밤......

내가 낯선 존재라니......

나는 참 기쁘다.
 
  - 시집<화창>의 자서 중. 김영승


타자가 된 나를 상상하며, 이 사랑스러운 웅성거림에 귀를 기울인다. 


by BarSur | 2009/03/12 18:43 | 읽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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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환상 at 2009/03/12 21:45
마르틴 부버가 생각나네요. 타자의 목소리라...
말하기보단 듣기를 좋아하는데, 요즘은 타자의 목소리가 그리워요.
이건 2차 데이트 신청인지도? ㅋㅋ;;
Commented by BarSur at 2009/03/15 17:11
3월도 벌써 절반이 지나가는데 말이죠. 개강 첫주부터 바뻐서 혼났네요. 환상님 전송회 자리는 꼭 만들어야 할 텐데 말이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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