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3월 12일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
소설 <광장>으로 유명한 최인훈이 1973년에 쓴 희곡 <봄이 오면 산에 들에>는 언어를 통해 꿈을 꾸었던 소설가가 언어가 아닌 다른 꿈을 꾸게 된 연유를 지시해주는 작품이다. 말더듬이 아버지와, 자꾸만 침묵하는 딸 달내, 그리고 바람소리 속에 섞여 흐느끼듯 존재하는 문둥병의 어머니.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소리'의 존재로만 등장하며 달내를 통해 재현되고 동일시되는 어미는 배제의 논리가 만들어낸 일종의 국외자인 것이다. 또한 달변의 포교를 통해 드러나는 랑그(Langue), 언어를 통한 권력의 작용이 존재한다면,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 말과 행동을 더듬은 아비의 모습과, 달내의 침묵이야 말로 우리에게 오히려 언어가 아니라 침묵 속에 진실이 숨겨져 있음을 알려준다.
문둥이의 탈을 통해 드러나는 어미의 존재는 푸코의 말처럼 "가면을 쓴 진실"을 지시해주는 것이며, 자신의 목소리로 소리낼 수 없는 광기(사회적 병리학을 통해 배제된 그 모든 것들 : 노인, 여성, 광인, 성적소수자, 불법체류자. 그 모든 우연적인 특성을 마치 고유의 정체성처럼 부여받은 자들)가 가지는 오롯한 자기증명이기도 하다. 어미가 흐느낌이 담겨있는 바람소리는 개인을 넘어서 어떤 집단적인 분노의 소리로 변화하는데, 이는 배제의 논리에 의해 국외자가 되어버린 자들의 흐느낌이기도 하다. 본디 소설을 보는 것은 언어를 보는 것이면서, 행간을 읽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침묵에서 소리를 듣는 행위이기도 한데, 이것을 모르면서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는 건 허사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1970년대, 언어로서 언어를 억압하는 시대에서 소설가 최인훈이 정통하지도 않은 희곡이라는 장르를 선택하면서 행위와 침묵으로 전달했던 가면의 진실과 그 목소리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그건 결국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 아닐가.
- 우찬제, <타자의 목소리> 중에서.
결국 딴소리지만, 2MB의 용량으로 유명한 현정부를 비롯한 현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압도적인 담론에 대해 내가 가지는 반감이란 아주 단순한 것이다.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줄 모르는, 상상력이 제한된 대뇌의 기능만을 수행하려는 모습. '국외자'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수용하려고만 하는 논리는 이미 용산참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던가. 그들은 자꾸만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추방한다. 일제강점기 임화의 <네거리의 순이> 이후 한 세기를 지나 정끝별 씨의 시 <또다시 네거리에서>가 또다시 지시하듯 이 훤히 뚫린 네거리에서, 또한 막힌 골목에서 우린 어디로 더이상 물러날 것인가.
이 아름다운 밤......
내가 낯선 존재라니......
나는 참 기쁘다.
- 시집<화창>의 자서 중. 김영승
타자가 된 나를 상상하며, 이 사랑스러운 웅성거림에 귀를 기울인다.
# by | 2009/03/12 18:43 | 읽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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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보단 듣기를 좋아하는데, 요즘은 타자의 목소리가 그리워요.
이건 2차 데이트 신청인지도? ㅋㅋ;;